안녕하세요, 문학정보입니다.
오늘은 n제 중 임춘의 가전체 소설 국순전 작품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n제의 작품의 주제 내용은 벼슬아치 풍자 입니다. 그럼 상세한 내용은 밑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임춘의 가전체 소설 국순전
임춘의 가전체 소설, 국순전(麴醇傳)
작가
임춘(林椿 11471197) 고려 중기의 문인. 호는 서하(西河). 정중부의 무신란 때에 일가가 피해를 입고,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다. 문명(文名)은 크게 떨쳤으나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였다. 불우한 일생을 보내면서도, 이인로 등과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시주(詩酒)로 생활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작품 감상하기
국순(麴醇)의 자(字)는 자후(子厚)이다. 그 조상은 농서 사람이다. 90대조(九十代祖)인 모(牟)가 후직(后稷)을 도와 뭇 백성들을 먹여 공이 있었다. 시경(詩經)에, "내게 밀과 보리를 주다."
한 것이 그것이다. 모(牟)가 처음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 먹으리라."
하여, 밭에서 살았다. 임금이 그 자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조서(詔書)를 내려 안거(安車)로 부를 때, 군(郡)과 현(縣)에 명하여 곳마다 후하게 예물을 보내게 하였다. 신하를 시켜 친히 그 집에 나아가, 드디어 방아와 절구[杵臼] 사이에서 교분을 정하였다. 화광 동진(和光同塵)하게 되니, 훈훈하게 찌는 기운이 점점 스며들어서 온자( 藉)한 맛이 있어 기뻐 말하기를,
"나를 이루어 주는 자는 벗이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옳다."
하였다. 드디어 맑은 덕(德)으로써 들리니, 임금이 그 집에 정문(旌門)을 표하였다. 임금을 따라 원구(園丘)에 제사한 공으로 중산후(中山侯)에 봉해졌다. 식읍(食邑)은 일만 호(一萬戶)이고, 식실봉(食實封)은 오천 호(五千戶)이며, 성(姓)은 국씨(麴氏)라 하였다. 5세손이 성왕(成王)을 도와 사직을 제 책임으로 삼아 태평 성대를 이루었고, 강왕(康王)이 위(位)에 오르자 점차로 박대를 받아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후세에 나타난 자가 없고, 모두 민간에 숨어 살게 되었다. 위(魏)나라 초기에 이르러 순(醇)의 아비 주(酎)가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서, 상서랑(尙書郞) 서막(徐邈)과 더불어 서로 친하여 그를 조정에 끌어들여 말할 때마다 주(酎)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침 어떤 사람이 임금께 아뢰기를,
"막이 주와 함께 사사로이 사귀어, 점점 난리의 계단을 양성합니다."
하므로, 임금께서 노하여 막을 불러 힐문하였다. 막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신이 주를 좇는 것은 그가 성인(聖人)의 덕이 있삽기에 수시로 그 덕을 마셨습니다."
하니, 임금께서 그를 책망하였다. 그 후에 진(晋)이 이어 일어서매, 세상이 어지러울 줄을 알고 다시 벼슬할 뜻이 없어, 유령(劉伶), 완적(阮籍)의 무리들과 함께 죽림(竹林)에서 노닐며 그 일생을 마쳤다.
순(醇)의 기국(器局)과 도량은 크고 깊었다. 출렁대고 넘실거림이 만경 창파(萬頃蒼波)와 같아 맑혀도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리지 않으며, 자못 기운을 사람에게 더해 주었다. 일찍이 섭법사(葉法師)에게 나아가 온종일 담론할 때, 일좌(一座)가 모두 절도(絶倒)하였다. 드디어 유명하게 되었으며, 호(號)를 국처사(麴處士)라 하였다. 공경(公卿), 대부(大夫), 신선(神仙), 방사(方士) 들로부터 머슴, 목동, 오랑캐, 외국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향기로운 이름을 맛보는 자는 모두가 그를 흠모하여, 성대(盛大)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순(醇)이 오지 아니하면 모두 다 추연하여 말하기를,
"국처사가 없으면 즐겁지가 않다."
하였다. 그가 당시 세상에 애중(愛重)됨이 이와 같았다.
태위(太尉) 산도(山濤)가 감식(鑒識)이 있었는데, 일찍이 그를 말하기를,
"어떤 늙은 할미가 요런 갸륵한 아이를 낳았는고. 그러나 천하의 창생(蒼生)을 그르칠 자는 이 놈일 것이다."
라 하였다. 공부(公府)에서 불러 청주 종사(靑州從事)를 삼았으나, 격의 위가 마땅한 벼슬 자리가 아니므로, 고쳐 평원 독우(平原督郵)를 시켰다. 얼마 뒤에 탄식하기를,
"내가 쌀 닷 말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鄕里) 소아(小兒)에게 향하지 않으리니, 마땅히 술 단지와 도마 사이에서 서서 담론할 뿐이로다."
라고 하였다. 그 때 관상을 잘 보는 자가 있었는데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 얼굴에 자줏빛이 떠 있으니, 뒤에 반드시 귀하여 천종록(千鍾祿)을 누릴 것이다. 마땅히 좋은 대가를 기다려 팔라."
라고 하였다. 진후주(陣候主) 때에 양가(良家)의 아들로서 주객 원외랑(主客員外郞)을 받았는데, 위에서 그 기국을 보고 남달리 여겨 장차 크게 쓸 뜻이 있어, 금구로 덮어 빼고 당장에 벼슬을 올려 광록 대부 예빈경(光祿大夫禮賓卿)으로 삼고, 작(爵)을 올려 공(公)으로 하였다. 대개 군신(君臣)의 회의에는 반드시 순(醇)을 시켜 짐작(斟酌)하게 하나, 그 진퇴(進退)와 수작이 조용히 뜻에 맞는지라, 위에서 깊이 받아들이고 이르기를,
"경(卿)이야말로 이른바 곧음[直] 그것이고, 오직 맑구나. 내 마음을 열어 주고 내 마음을 질펀하게 하는 자로다."
라 하였다. 순(醇)이 권세를 얻고 일을 맡게 되자, 어진 이와 사귀고 손님을 접함이며, 늙은이를 봉양하여 술·고기를 줌이며, 귀신에게 고사하고 종묘(宗廟)에 제사함을 모두 순(醇)이 주장하였다. 위에서 일찍 밤에 잔치할 때도 오직 그와 궁인(宮人)만이 모실 수 있었고, 아무리 근신(近臣)이라도 참예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위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정사를 폐하고, 순은 이에 제 입을 재갈물려 말을 하지 못하므로 예법(禮法)의 선비들은 그를 미워함이 원수 같았으나, 위에서 매양 그를 보호하였다. 순은 또 돈을 거둬들여 재산 모으기를 좋아하니, 시론(時論)이 그를 더럽다 하였다.
위에서 묻기를,
"경(卿)은 무슨 버릇이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두예(杜預)는 좌전(左傳)의 벽(癖)이 있었고, 왕제(王濟)는 말[馬]의 벽이 있었고, 신(臣)은 돈 벽이 있나이다."
하니, 위에서 크게 웃고 권고(眷顧)가 더둑 깊었다. 일찍이 임금님 앞에 주대(奏對)할 때, 순이 본래 입에 냄새가 있으므로 위에서 싫어하여 말하기를,
"경이 나이 늙어 기운이 말라 나의 씀을 감당치 못하는가."
라 하였다. 순이 드디어 관(冠)을 벗고 사죄하기를,
"신이 작(爵)을 받고 사양하지 않으면 마침내 망신(亡身)할 염려가 있사오니, 제발 신(臣)을 사제(私第)에 돌려 주시면, 신(臣)은 족히 그 분수를 알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위에서 좌우(左右)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나왔더니, 집에 돌아와 갑자기 병들어 하루 저녁에 죽었다. 아들은 없고, 족제(族弟) 청(淸)이, 뒤에 당(唐)나라에 벼슬하여 벼슬이 내공봉(內供奉)에 이르렀고, 자손이 다시 중국에 번성하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국씨(麴氏)의 조상이 백성에게 공(功)이 있었고, 청백(淸白)을 자손에게 끼쳐 창( )이 주(周)나라에 있는 것과 같아 향기로운 덕(德)이 하느님에까지 이르렀으니, 가히 제 할아버지[祖]의 풍이 있다 하겠다. 순(醇)이 들병의 지혜로 독 들창[ 甕 ]에서 일어나서, 일찍 금구의 뽑힘을 만나 술단지와 도마에 서서 담론하면서도 가(可)를 들이고 부(否)를 마다하지 아니하고, 왕실(王室)이 미란(迷亂)하여 엎어져도 붙들지 못하여 마침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거원(巨源)의 말이 족히 믿을 것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줄거리
주인공 국순의 조상은 농서 사람으로 90대 조상인 모(牟보리)가 후직(농사를 맡은 벼슬)을 도와 백성들을 먹여살린 공이 있었다.
모는 처음에 숨어살며 벼슬하지 않고 이르기를 나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만 먹으리라고 하며 밭에서 살았다. 임금을 좇아 원구(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에 종사한 공으로 중산후로 봉하여졌고, 국씨(麴氏)라는 성을 받았다.
위나라 초기에 이르러 국순의 아버지 주(酎소주)가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 상서랑 서막과 더불어 서로 친해져서 주가 입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국순의 기국과 도량은 크고 깊어 출렁거리고 넘실거림이 마치 만경창파의 물과 같아 맑게 해도 더 맑지 않고, 흔들어도 흐려지지 않았으며, 그 맛이 한때에 드날리고 자못 사람에게 기운을 더해 주었다. 군신의 회의에는 반드시 국순이 나아감에 그 진퇴와 수작이 임금의 뜻에 맞아 마침내 권세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손님 접대, 노인봉양, 고사(告祀) 및 종묘제사를 모두 국순이 주재했다.
그러나 국순은 전벽(錢癖돈을 밝히는 병통)이 있어서 당시의 의론이 그를 더럽게 여겼다. 국순이 늙어 관을 벗고 물러날 때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작(爵)을 받고 사양하지 않으면 마침내 망신할 염려가 있사오니 신을 집에 돌아가게해 주시면 족히 그 분수를 알겠나이다라 하고 집에 돌아와 갑자기 병이 들어 하루저녁에 죽었다.
사신이 이르기를,
국씨의 조상이 백성에게 공이 있어 국순이 벼슬에 발탁되었으나 왕실이 어지러워 엎어져도 붙들지 못하더니 마침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거원(중국 진나라의 문인인 산도를 이름)의 말이 족히 믿을 만하다고 하였다.
핵심정리
▶연대 : 고려 중엽
▶형식 : 가전체
▶구성 : 일대기를 중심으로 한 순차적 구성, 도입전개논평의 3단 구성
▶성격 : 풍자적, 교훈적
▶표현 : 의인법
▶짜임 : 도입, 전개의 2단구성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제재 : 술(누룩)
① 도입 국순의 가계(家系) 소개
② 전개 국순의 성품과 정계 진출, 임금의 총애와 국순의 전횡(專橫), 국순의 은퇴와 죽음
③ 논평 국순의 생애에 대한 사관의 평가
▶특징 : ① 술을 의인화 하여 표현 ② 계세징인(戒世懲人)의 교훈성이 강한 작품
③ 술의 부정적 측면을 풍자하고 있다. ④ 전(傳)의 형식으로 인물의 일대기를 서술하고 있다.
▶의의 : ①현재 전하는 가전체 작품의 효시가 된다. ② 같은 술을 의인화한 이규보의 국선생전에 영향을 주었다.
▶주제 : 인간이 술을 애증하다 타락. 패망함을 풍자함. 간사한 벼슬아치의 풍자
▶출전 :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동문선(東文選)
내용연구
후직 : 주나라 때 농사를 맡은 벼슬
국순 : 술을 의인화한 말. 술은 누룩으로 빚으므로 술의 성은 국이고, 이름은 순
모 : 보리를 의인화한 말
조서 : 임금의 뜻을 적은 문서
화광동진 : 자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세속을 따름
온자 : 교양이 있고, 도량이 크며 얌전함.
정문 : 공이 있는 집에 나라에서 세워 주는 문
원구 : 천자가 동지에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중산후 : 벼슬 이름
식읍 : 나라에서 공신에게 주어, 조세를 개인이 맡아 쓰게 한 고을
식실봉 : 실봉과 식읍. 실봉은 봉읍에서 바치는 조세를 실제로 받을 수 있는 식봉
금고 : 신분에 허물이 있어 벼슬에 쓰지 않음.
서막 : 태평광기에 나오는 인물로 술을 먹으면 정신이 아득해져서 천천히란 뜻으로 막을 이름으로 함.
힐문 : 잘못된 점을 따져 물음
기국 : 사람됨의 그릇 크기
섭법사 : 섭은 성씨의 종류. 법사는 승려의 별칭, <태평광기>의 섭법선(葉法善) 설화에 나오는 인물.
담론 : 담화와 의론
절도 : 대단히 감탄함.
처사 : 조용히 은거하며 사는 선비
방사 :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
추연 : 처량하고 구슬픈 모양
종묘(宗廟) :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참예(參詣) : 나아가서 뵘.
창 : 옛날 강신제(降神際)에 썼다는, 옻기장을 재료로 하여 빋은 술 이름. 창주
들병[설병] : 술동이.
들창[옹유(甕유)] : 항아리 뚜껑.
금구(金毆) : 금 또는 쇠로 만든 사발이나 단지.
미란(迷亂) : 정신이 흐러멍덩하여 어지러움.
거원(巨源) : 중국 진나라의 높은 선비로 죽림 칠현의 한 사람인 산도(山禱)의 자(子). 공정한 성풍에 덧붙여 인물을 보는 감식안이 있어 그가 골라 뽑은 인물은 모두 한 시대에서 빼어난 선비였다고 한다.
90대조인 국씨라 하였다 : 국순의 조상인 모는 농사를 지어 백성들을 먹인 공로로, 중산후에 봉해지고 국씨 성을 하사받음. 구순의 신분과 조상의 내력
임금을 따라 원구에 제사한 공으로 : 천자가 동짓날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주로 사용된 공으로
5세손이 성왕을 살게 되었다 : 5세손이 성왕 때는 사랑을 받았지만 강왕 때는 금주령이 내려져 숨어 살았다. 한 인물의 다양한 삶의 변화를 드러냄.
막이 주와 계단을 양성합니다 : 주는 세 번 빚은 술로서, 먹으면 정신이 아득해져 늘 술에 취해 있었음을 뜻함.
국처사가 없으면 즐겁지가 않다 : 태평광기의 국수재 설화와 관련된 부분으로, 국처사(술)로 취할 수 있으므로 그가 있어야만 즐겁다.
이로부터 ∼ 보호하였다 : 임금이 술에 절어 정사를 살피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순은 입을 굳게 다물고 그 앞에서 간언(諫言)할 줄 모르니 예법을 지키는 선비들은 마치 원수와도 같이 그를 미워하게 되었으나 임금은 언제나 그를 감싸고 돌았다는 뜻으로 술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간신배들의 은유이다. 이들에 의해 국정이 문란해지고 있음을 암시 해준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임춘의 국순전과 함께 술(누룩)을 의인화하여 위국 충절(爲國忠節)을 교화한 가전(假傳)문학이다. 국선생전은 국순전의 영향을 받아 창작되었으나, 국순전이 향락만을 일삼는 요사한 벼슬아치를 풍자한 반면, 국선생전은 위국 충절의 대표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사회적 교화를 강조하였다.
작자는 이 작품에서 술을 의인화하여 그 인물을 선생이라 일컫고, 국성이라고까지 칭찬했다. 국성의 공적은 막힌 것을 열어주고, 경화된 것을 풀어 주는 데 있다고 본 데에서 작자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줄거리
고려 무신 집정 때 문인 임춘이 술을 의인화하여 지은 가전 작품이다. 작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생과 술의 관계를 문제삼고 있다. 즉, 인간이 술을 좋아하게 된 것과 때로는 술 때문에 타락하고 망신하는 형편을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인간과 술의 관계를 통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조명해 본 것이다. 당시의 국정의 문란과 병폐, 특히 벼슬아치들의 발호와 타락상을 증언하고 고발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이 작품은 모리배들의 득세, 뛰어난 인물들이 오히려 소외당하는 현실을 풍자,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같은 술을 제재로 술을 의인화한 이규보의 국선생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국순전(麴醇傳)과 국선생전(麴先生傳)과의 관계
국순전
국선생전
영향 관계
국선생전에 영향을 줌
임춘의 국순전의 영향을 받음
주제상의 차이점
요사하고 아부하는 정객들을 꾸짖고 방탕한 군주를 풍자
미천한 몸으로 성실히 행동했기 때문에 등용되었고, 총애가 지나쳐 잘못을 저질렀지만 물러난 후 반성하고 근신할 줄 아는 인간상을 그림. 즉 국난을 당했을 때 백의종군까지 하는 위국충절의 대표적 인간상을 등장시켜 사회적 교훈을 강조.
인물
문약과 방탕한 무리 ⇒부정적
위국충절의 대표적 인물 ⇒긍정적
1. 영향 관계 :
관련 인물과 지명, 서술 방식 등에 있어 많은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규보의 국선생전은 이보다 앞서 나온 임춘의 국순전에서 제목, 관련 인물, 지명, 서술 방식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 주제상의 차이점 :
국순전이 요사하고 아부하는 정객들을 꾸짖고 방탕한 군주(君主)를 풍자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면, 국선생전은 미천한 몸으로 성실히 행동했기 때문에 관직에 등용되었고, 총애가 지나쳐서 잘못을 저질렀지만 물러난 후 반성하고 근신할 줄 아는 인간상을 그렸다. 즉, 국난을 당해서 백의종군(白衣從軍)까지 하는 위국 충절의 대표적 인간상을 등장시켜 사회적 교훈을 강조하였다.
3. 본을 삼은 작품 :
송나라때의 <태평광기(太平廣記)>의 서막(徐邈)설화에서 많은 본을 받았으며, 청화선생전(淸和先生傳)에서 직접 본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4. 술을 소재로 한 작품들
조선조의 수성지, 천군연의, 천군본기 등도 술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계승되었다.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이인로가 그의 지기(知己)인 임춘이 죽자 그 유고(遺稿)룰 모아 엮은 시문집이다. 1222년에 처음 간행되었으나 초간본 중 완질로 전하는 것은 없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숙종, 고종 때 중간되었다. 국순전, 공방전은 한국 문학사상 가전 작품의 효시가 되며 술과 돈을 의인화하여 국정을 담당하는 군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가전(假傳)의 이해
임춘, 이규보 등에 의해 고려 중기에 처음 나타난 가전은 원래 사마천(司馬天)이 <사기(史記).열전을 창시함으로써 시작된 전(傳)의 일종이다. 고려 중기 이러한 가전이 나타난 것은 이미 전통적으로 조신전(調信傳), 고승전(高僧傳), <삼국사기> 열전 등에서 사람의 일생을 서술하는 문학 갈래와, 화왕계같은 의인 문학의 형태가 축적되고 있었고, 덧붙여 한유의 모영전(毛潁傳)을 위시해서 당·송의 가전이 당시 문사들에게 많이 읽혀진 데 기인한다.
가전은 삽화적 구조로 되어 있지만 삽화 사이에 인과 관계는 없다. 삽화는 모두 중국 역사에 나타난 인물들의 고사로, 소재와 관련되었을 뿐, 상호 간에는 전혀 무관한 역대 인물들의 고사를 한데 엮어 주인공의 행적을 형성함으로써, 소재로 등장하는 사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공과(功過)를 한 인물의 입전 형태로 설명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진실성, 규범적 인간상의 확립을 시도한다.
작품의 말미에는 서술자의 개입이 분명하게 드러나 여기서 서술자는 사관(史官) 신분으로 입전 인물의 가치 평가를 내린다.
▲영향 : 송나라 때의 〈태평광기(太平廣記)〉의 서막(徐邈)설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청화선생전(淸和先生傳)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
▶국순 : 술을 의미한다. 기국과 도량이 크고 깊어 권세를 얻게 되나, 전벽과 입냄새로 인하여 물러나게 된다.
이해와 감상
술을 의인화(擬人化) 하여 술에 탐닉하다가 패망함을 풍자한 가전체 문학의 효시이다. 고려 고종 때 임춘이 지은 작품으로서, 가전체 작품이 모두 그렇듯이 이 작품도 교훈성이 강하고 세상을 경계하고 사람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술의 내력과 성쇠를 통하여 술에 빠져 향락만을 일삼는 문신들과 방탕한 무리들을 풍자하고 요사스런 간신배들을 엄준하게 꾸짖고 있다. 이와 같은 가전체는 전기(傳記)의 형식과 허구적 성격으로 후대 소설 형성의 모태가 되었다.
더 알아보기
국순전과 국선생전과의 관계
1. 영향 관계
관련 인물과 지명, 서술 방식 등에 있어 많은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규보의 국선생전은 이보다 앞서 나온 임춘의 국순전에서 제목, 관련 인물, 지명, 서술 방식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 주제상의 차이점
국순전이 요사하고 아부하는 정객들을 꾸짖고 방탕한 군주를 풍자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면, 국선생전은 미천한 몸으로 성실하게 행동하였기 때문에 관직에 등용되었고, 총애가 지나쳐서 잘못을 저질렀지만 물러난 후 반성하고 근신할 줄 아는 인간상을 그렸다. 즉, 국난을 당해서 백의종군(白衣從軍)까지 하는 위국충절의 대표적 인간상을 등장시켜 사회적 교훈을 강조하였다.
3. 본을 삼은 작품
송나라 때의 <태평광기(太平廣記)>의 서막(徐邈) 설화에서 많은 본을 받았으며, 청화선생전(淸和先生傳)에서 직접 본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가전체 소설
교훈을 목적으로 사람의 일생을 압축 · 서술한 교술 문학이다. 물건을 의인화하여 경계심을 일깨워 줄 목적으로 지어졌다. 앞서 생성된 패관문학이 개인의 창작물이 아님에 비하여 가전은 개인의 창작물이어서 소설에 한 발짝 접근된 형태이다. 가전의 대표작에는, 임춘국순전(술 의인화). 공방전(돈 의인화). 이규보국선생전(술 의인화).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거북이 의인화). 이곡죽부인전(竹夫人傳 대나무 의인화). 이첨저생전(楮生傳 종이 의인화). 석식영암정시자전(丁侍者傳 지팡이 의인화) 등이 있다.
가전체 양식의 창작 배경 및 효과
가전체 문학의 발달은 무신란 이후에 등장한 신진 사대부들의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객관적 관념론자인 그들은 세계와 인간 생활을 구성하는 실제적 사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던 바, 이에 따라 사물과 관념을 긴밀하게 통합하여 파악하는 양식인 가전(暇傳)이 등장하 게 되었다. 가전은 인간사의 다양한 문제를 의인화라는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수법으로 다루면서 비평하고 있기 때문에 강한 풍자성을 수반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의인화하여 그 가계와 생애 및 성품, 공과(功過)를 서술하기 위해 대상이 되는 사물에 얽힌 여러 전고(典故)를 많이 도입하고 있어 자못 현학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보통이다.
<참고 4> 가전체 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가전체 문학은 설화와 서사시가 활발히 수집, 정리되고 창작되었던 고려시대에 출현하였다. 패관(稗官) 문학이 개인의 창작이 아니고 민간에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를 수집하여 약간의 창의성을 덧붙인 데에 비하여, 가전체는 작가가 예술적 상상을 동원하여 창작한 허구적인 개인 창작물이다. 또한 가전체 문학은 선행 문학 장르인 설화에 비해 인물 설정, 사건과 갈등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구성 등 소설적 요소를 상당히 갖추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가전체 문학은 소설에 한 단계 접근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가전은 역사적 사실을 관념적으로 나열하였으며, 작품 내족 세계의 독자성이 확보되지 않았고, 또한 인물이나 사건의 서술적 형상화 정도가 미흡하기 때문에 아직 소설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가전체 문학은 설화와 소설을 이어주는 교량적 구실을 한 것으로, 이후 김시습의 <금오신화> 등의 고전 소설 발생의 토양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댓글